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앙리 마티스

펀펀공지사항

by 조작가의 책세상 2021. 5. 22. 11:59

본문

앙리 마티스(1869~1954)

색채의 혁명가이자 야수파의 창시자가 앙리 마티스이다.
앙리 마티스는 '그림에서 색을 해방시켰다'고 평가받는 야수파의 대표작가로 그림을 그린 열정남(하루 11시간 그림을 그리다)으로 피카소,샤갈과 더불어 프랑스 3대 화가로 손꼽힌다.

마티스는 화가가 되기 전에 고시준비생이었고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법률사무소에서 서기로 일했다. 마티스는 1869년 프랑스 북동부의 시골 마을 르카토 캉브레지 부유한 곡물상의 아들로 태어나 엄격한 아버지와 다정한 어머니("내가 하는 모든 것을 사랑해주셨다")밑에서 자랐다. 어머니는 아마추어화가였는데 자신의 예술적 영감이 모두 어머니에게서 받은 것이라 술회했지만 그 또한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고등학교때는 데생으로 1등)

그림에 문외한이던 아버지(가업을 물려받거나 법을 공부하라고 설득)가 떠밀어 법률사무소 서기로 일했지만 그리 기쁘지 않았고('이건 내 일이 아니야') 20살 무렵 맹장염수술을 한다. 무료한 병상생활중에 어머니가 아들의 지루함을 달래주고자 물감을 선물한다."물감 상자를 받는 순간 이것이 내 삶임을 알았다" 고 말한 그는 법률사무소를 그만두고 미술학교에 입학한다. 주위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의 별명은 '마을의 멍청이'였다. 그리할찌라도 사람들의 비난과 조롱에 고개 숙이지 않았다.

마티스는 이후 매일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11시간씩 캔버스 앞에서 그림을 그렸다.
마티스는 그림재현('보이는 대로')에서 표현으로 방향전환을 한다. <책이 있는 정물>


그에게 상징파 화가인 귀스타브 모로(피사체의 내면을 봐야하고 본질을 포착하라)는 진정한 스승이었다. 마티스에게도 샤갈처럼 그의 그림작업을 지원해준 사람은 어머니외에도 연인인 아멜리 파레이르가 있었다.언제나 후원자이자 때론 모델이 되어주기도 했다.동거하다가 둘은 결혼한다.
신혼여행은 지중해의 코르시카섬으로 간다.마티스는 이곳에서 뜨거운 태양이 만들어내는 화려한 색채의 이국적인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어김없이 마티스에게도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쳐 고생을 하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건강마저 나빠진다.
그림을 그만둘지 고민한다.
그때의 심경(화가의 인생과 가치관을 이해하고,공감하다 보면 눈앞에 놓인 그림뿐 아니라 그림 너머의 작가와도 교감하게 된다)을 표현한 작품이 <차양 밑의 화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는 개나 줘버리고 자신을 믿으며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나간다.


이 시기에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화가들을 만나는데 이른바 '야수파'의 시작(1905)이 되고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사람들은 도저히 작품을 이해할 수 없다며 욕을 했다)이 논란의 대상이 된다.
작품 속 여인은 마티스의 아내이다.

색의 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한 평론가는 "고통스러울 만큼 현란한 작품"이라고 악평을 한다.심지어 아내마저 이 작품을 보고 화를 냈다고 카더라. 바로 이 전시회에서 '야수파'라는 명칭이 탄생한다.

"나는 내 노력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고,그저 내 그림들이 봄날의 밝은 즐거움을 담기를 바랐다.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아무도 모르게 말이다."

그는 그림을 통해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게 아니라 즐거움을 선사해주고 싶었다.


<삶의 기쁨>(마티스가 가진 야수파의 특징이 절정에 달한 작품)이 화단의 평가가 엇갈리는 가운데 마티스의 진가를 알아본 아트 컬렉터(레오 스타인과 거트루드 스타인 남매)가 나타난다. 마티스의 생활이 조금씩 좋아진다. '섬유 왕'으로 불렸던 러시아의 대부호 세르게이 시츄킨도 후원자중 한 사람이다. 그의 부탁으로 <춤>("춤은 삶이요,리듬이다"마티스의 마음)도 그린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집이 파괴되고 어머니와 동생도 끌려가 감감무소식이 되어 극심한 공포를 느꼈던
마티스의 그림에도 영향을 미친다. (작품과 화가의 상황,감정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그림이 단순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콜리우르의 프랑스식 창문>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기관지염이 악화되어 니스로 생활터전을 옮겨 작업을 한다. 여기서 기존의 아름다운 색채를 되찾는다.




전쟁의 공포와 건강문제를 겨우 극복한 마티스는 1941년 심각한 병(십이지장암)에 걸리고 수술성공,유행성감기와 두 차례의 폐색전증을 앓아 더 이상 붓을 들고 유화를 그릴 수 없게 되자 캔버스에 구아슈를 발라 오려내는 컷아웃cutout으로 걸작을 창조한다. 꺾인 붓 대신 가위를 들고 작품활동을 한 것이다. <폴리네시아바다>,<폴리네시아하늘>이다.
하늘과 바다를 그리고 300마리가 넘는 새를 키우며 관찰하고 많은 거장들이 나이가 들면 '어린이의 마음으로 그리고 싶다'고 했듯이 마티스도 그랬다.


마티스는 말년(77세)에 로사리오 성당(니스 근교의 작은 마을 방스)을 장식한다.(자기를 돌봐준 모니크 부주아라는 간호사에 대한 감사의 차원에서) 예술 인생에 정점을 찍는 작업이었다. <성 도미니크>,<십자가의 길> 벽화와 창문에는 <생명의 나무>가 그려져 있다.



"내 인생 최고의 업적이다.나는 이제 떠날 준비가 됐다"

1954년 향년 85세의 나이로 거장은 떠났지만

"일이 모든 것을 치유한다"

"내가 꿈꾸는 미술이란 정신노동자들이 아무 걱정,근심없이 편안하게 머리를 누일 수 있는 안락의자 같은 작품이다."

"지치고 낙담한 사람들이 내 그림을 보고 평화와 고요를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말을 남겼다. 죽기 전날 자신을 간호해 준 리디아의 모습을 그려주었다고 한다. 역시 거장은 다르다.

*출처:<내가 사랑한 화가들>(정우철) 앙리 마티스 부분을 요약한 것이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