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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사장의 북트래블(51)

북트래블

by 조작가의 책세상 2021. 4. 9.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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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코로나북트래블(51)(2021.04.09.금)

<백석평전>(안도현지음)

"스무 살,백석이 처음 내게 왔다.그때부터 30년 동안 그를 짝사랑해왔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평전> 오랫 전에 구입한 책인데 이제야 다시 읽는다.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려면 맥이 끊어져서는 안된다. <사슴>의 시인 백석(이름은 백기행,1912~1996,85세)은 일본 아오야마 학원 유학을 다녀오고 조선일보로 기자로 근무하다다 함흥 영생고보(영어수업과 축구부지도)에서 교편을 잡은 모던보이다. 그의 나이 26살에 만난 기생인 22살의 진향이를 마누라라 부르고 아호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정주에 살던 아버지 백영옥이 조선일보 객원 사진기자로 일하게 되어 경성으로 이사감에 따라 백석도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러 경성으로 간다.

경성에서 통영으로 간다.백석의 마음 한켠에는 통영의 박경련이 남아 있었다. 백석이 박경련에게 청혼했으나 친구 신현중의 농간(백석의 어머니가 기생출신이라는 가짜뉴스를 유포)으로 깨져버렸다.함흥으로 다시 돌아와 러시아회화를 배우기 시작한다. 풍문에 통영의 박경련과 그의 절친 신현중의 결혼소식이 날아든다. 백석은 수첩에서 붉은 펜으로 신현중의 이름을 지워버린다. 백석의 이루지 못한 사랑은 실연의 상처가 되어 그의 시에 파편처럼 꽂혀있다.그 당시 '모던 걸'들은 최정희(소설가 김채원의 모이고 남편은 파인 김동환이다),노천명,시인 모윤숙(대표작이 '사슴'이다)이었다.
이 세 사람의 대화에는 백석이 늘 들어있었다.그녀들은 백석을 '사슴'이나 '사슴군'으로 호칭했다.


1937년 7월7일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식민지 조선사회는 발 빠르게 친일로 바뀐다. '조선일보'(사장 방응모)와 '동아일보'(사장 김성수) 언론사들이 한 몫했다. 기회주의적인 지식인들과 문인( 이광수,최남선,박영희등)들도 '내선일체'와 '대동아공영론' 말하며 일왕을 찬양하고 전쟁 병력과 물자동원에 지대한 공헌(?)을 했드랬다.

백석은 부모의 성화에 못이겨 '자야'를 놔두고 경성에서 장가를 들었다.만주로 떠나자는 백석의 제안을 거부하고 자야는 경성으로 올라와 청진동에 집을 마련한다.현재 종로구청건물 앞이 청진동이다. 몇 달 후 수소문끝에 경성 청진동에 있는 자야를 만나고 그녀의 집에서 꿈같은 하룻밤을 보내고 지은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내민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불미스런 일로 백석은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편집자로서 삶을 살고 자야와 1년 남짓 동거를 한다.
다시 부모의 손에 이끌려 장가를 간다.억지결혼을 백석은 두 번 한 것이다.백석은 혼자 만주로 1939년 연말에 떠난다. 정확한 날자는 1940년 2월7일이다. 만주 신징에서 국무원 경제부 일도 했다.
농사를 짓고 살려고 했으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기의 강을 건너고 있었다.친일문학이 대세일 때 그는 한발짝 비켜 있었다. 1941년 신징을 떠나 안둥으로 거처를 옮기고
평양에서 문경옥과 결혼(마지막 부인으로 리윤희도 있다)하여 1년 남짓 같이 살았는게 이때 잠시나마 백석은 생활의 안정을 취하게 된다. 신접살림은 안둥(단둥)에서 차리고 안둥의 세관에서 일한다.

어쩔수없이 백석도 '시라무라 기코'로 창씨개명을 한다. 아내 피아니스트 문경옥과는 관계가 좋지 않았다. 1942년 중반에서 1947년 말까지 백석의 시는 침묵한다.해방이 되자 백석은 정주로 이동한다.백석은 김일성과 동년배다.1912년생이다.고당 조만식의 권유로 평양으로 간다.김일성도 만나기도 했다.백석은 34살 때 리윤희(20살)와 결혼한다. 백석은 조만식의 통역비서로 일했다.
그 당시 남쪽에서는 미군이 우익정권을,북쪽에서는 소련군이 김일성을 중심으로 좌익정권을 세우는 일에 골몰할 때다.


백석은 38선 이남으로 가지 않고 한설야의 도움으로 시는 쓰지 않고 러시아문학을 번역한다.더불어 아동문학에 빠져든다.벌써 백석은 세 아이의 아버지였다.아내 리윤희사이에 낳은 맏아들 백화제(1946),딸 지제(1951),둘째아들 중축(1955)이다.아이들에게 읽히고 싶은 동화시를 썼다.백석이 말하는 시의 요건은 1)생활에서 우러난 감정2)사색의 중요성 3) 언어를 부리는 법이다.

1958년 그의 47세때 9월의 '붉은 편지 사건'이후 창작과 번역등 문학적인 활동이 대부분 중단되고 1959년 백석은 48살 현지파견의 임무를 부여받아 북한에서도 최고의 오지로 꼽히는 삼수군으로 간다. 삼수갑산이란 곳이 바로 이곳이다. 백석은 협동조합에서 양을 치면서 인사성이 밝고 겸손한 사람이었고 틈 나는대로 청소년들에게 문학 창작 지도를 하였다.

평양에서 삼수군으로 쫓겨날 즈음 백석에게 시는 생활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삼수군에서 백석은 1959년부터 1996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살았다.결국 평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1996년 1월 백석은 85살로 세상을 마감한다.3남2녀를 두었다.
백석의 연인 자야 김영한 성북동에 '대원각'이라는 큰 요정을 경영했고 1996년 대원각이 들어선 7,000여 평의 땅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했고 1년 뒤에 사찰 길상사가 완공되었다.1999년 자야 여사는 83살로 세상을 떠났다.
"한겨울 눈이 제일 많이 내린 날 내 뼛가루를 길상사 마당에 뿌려 달라."

"<백석평전>은 '백석학'연구의 빛나는 결정판이다.
백석시인의 시정신은 한국인들의 삶과 영혼 속에 깊이 뿌리박혀있다."(이동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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