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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평전>(신병주지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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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작가의 책세상 2021. 3. 19.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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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평전>(신병주지음)(한겨레출판)

사화의 시대,성리학적 이상을 꿈꾼 개혁가의 비상과 추락
"시대에는 졌지만 역사를 앞서나가다"

1.조광조(1482~1519; 호는 정암,조선 성리학의 핵심 인물)는 우리 역사의 대표적인 개혁가로 알려져 있는 반면에 유배지 능주에서 38세의 젊은 나이에 생애를 마감했던 비운의 인물이다.
폭군 연산군의 폭정에 시달리던 시기에 중종반정(1506년,연산군의 이복동생 진성대군이 중종이 된다.'반정'은 바른 것으로 되돌린다.)이 일어난다. 성리학의 이념으로 완전 무장한 조광조라는 인물은 왕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2.조광조는 어려서부터 행실이 바르고 아이답지 않게 근엄하며 남의 실수를 용서하지 않는 엄격함을 보였다.항상 의관을 단정히 하고 언행이 절제가 있는 품행이 방정했다.1510년,과거 초시에 장원급제를 한다.
스승 김굉필과 만남은 조광조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놨고 <소학>)(김굉필이 특히 중시한 책으로,주자가 삼대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경사자집의 여러 책에서 주요한 내용을 발췌하여 편집한 책이다)공부를 열심히 한다. 중종은 '반정3인방' 박원정,유순정,성희안이 차례로 죽자 당신의 입지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1515년 중종의 성균관 방문시 내린 책문에 조광조의 답안인 대책(문)은 중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이후 조광조는 초고속 승진을 하고 중종에게 직언하는 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조광조라는 이름은 실검1위에 올랐다.

3.
조광조의 생애와 개혁정치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화라는 시대적.정치적 배경이다.사화라는 단어는 한자의 의미 그대로,사림파(가 정치적으로 우세해진 선조 초반 무렵부터 사화라는 표현이 직접적으로 쓰이기 시작)와 훈구파(는 선조 즉위 후 역사에서 완전히 소멸)의 정치적 대결에서 '사림파가 화를 당했다'('훈구파=가해자,사림파=피해자')라는 뜻을 담고 있다.

1498년 무오사화(훈구파와 사림파의 첫 충돌),1504년 갑자사화(폐비 윤씨의 죽음),1519년 기묘사화,1545년 을사사화가 조선을 움직인 4대 사화이다. 사화는 훈구파와 사림파가 정치적으로 충돌한 사건인데 사화의 가장 큰 주역은 왕이다. 기묘사화의 비극은 왕권에 대한 견제 장치로서 성리학의 이념을 무기로 하여 등장한 신권의 도전에서 신권,즉 조광조가 패배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기묘사화는 우리 역사상 가장 개혁적인 인물이었던 조광조의 정치 노선이 중종과 보수 세력의 반격을 받아 좌초한 사건으로 정리된다.

4.조광조의 가장 큰 죄목은 붕당을 형성한 죄였다. 중종은 조광조에 대한 애증이 있었고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몸통이었다.조광조는 현량과 실시,정국공신 개정등을 개혁정치에 박차를 가한다.최고의 파트너였던 조광조를 중조는 복권 안 시키고 승하한다.그 뒤를 이은  인종(재위기간 2년 1544~1545)때에 조광조를 복권시키려고 했으나 완전한 복권은 1567년 선조 즉위 후 사림정치가 본격적으로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5.1519년 기묘사화로 희생된 지 91년만인 1610년 ( 광해군 대)문묘에 종사됨으로써 조광조는 조선 사림의 상징으로 부활했다.

6.정조는 문정공 조광조를 존숭했다. 조광조는 중종에게  군주의 도덕정치를 주문했고 경연을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강하게 피력했다. 둘 사이는 철도의 궤도처럼 '위험한 동반자'였다.중종은 이중성을 가진 두 얼굴의 군주였다.

7.조광조의 급진성과 과격함,그리고 개혁 지지기반의 상실등으로 개혁의 완성에는  못 미쳤다.역사에는 언제나 보수와 개혁 사이의 진통이 따르는 시대가 있다.조광조의 개혁정치와 그 실패 원인이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때이다.


"고인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을 못 뵈어,고인을 못 뵈어도 가던 길 앞에 있네.가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가고 어찌할까"-퇴계 이황-


*평전을 쓰고 읽는다는 것은 옛사람이 남긴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의 마음과 시대를 헤아려보는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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