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말라는데 가고 싶은 길이 있다』 나태주 ‘풀꽃 시인’이 말하는 시와 사랑, 그리고 인생
메마른 현대사회에서 나태주 시인의 시는 가뭄 속 단비 같다. 그의 글 속에 담긴 자연과 사랑, 인생은 순수하고도 열렬하다. 글쓰기는 남들이 가지 말라고 했지만, 가고 싶은 길이었다. 그래서일까. 술술 읽히는 그의 시는 한 땀 한 땀 진심이 가득하다.
등단 50주년을 맞아 나태주 시인의 일생이 담긴 시전집 『가지 말라는데 가고 싶은 길이 있다』가 출간됐다. 이를 기념하여 벚꽃이 풀꽃으로 물들던 어느 봄날, 나태주 시인에게 시와 사랑, 인생을 물어봤다.
가지 말라는 길이지만 그 길은 당신이 가고 싶은 길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이라는 것!
당신은 분명히 지금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그쪽으로 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 인터뷰 중에서
나태주 시인님, 반갑습니다. 반디앤루니스 독자 분들께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충남 공주에 살면서 시를 쓰는 사람 나태주입니다. 나이가 많습니다. 1945년생이니까 이제 76세 되는 사람입니다. 43년 동안 초등학교 교직에 있었습니다. 2007년 정년퇴임을 한 후에는 시 쓰는 일만 하고 있습니다. 정년 이후 공주문화원장으로 8년 동안 일을 했고 지금은 늦은 나이이긴 하지만 한국시인협회 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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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50주년, 5천 페이지의 시 중에서 400여 편을 추려 <가지 말라는데 가고 싶은 길이 있다>를 출간하셨습니다. 책에 대한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좋은 출판사를 만나 그런 책을 한번 찍어보았습니다. 시전집이라면 모르겠지만 시선집으로 그렇게 두꺼운 책은 아마 이 땅에서 한 번도 없었지 싶습니다. 특별한 책이라고 할 것입니다. 시는 본래 경전의 문장과 같아야 합니다. 한 단어 한 문장도 거짓이 없어야 하고 더하지도 못하고 빼지도 못하는 문장이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경전과 같은 책을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내가 낸 어떤 책보다도 마음에 들고 이제껏 본 그 어떤 책보다도 마음에 듭니다. 그렇다고 시의 내용이 전부 마음에 든다는 건 아닙니다. 조용한 부끄러움과 고마움과 자랑스러움이 교차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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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다채롭게 해석한 시들이 깊은 여운을 남겼는데요. 청년 시절부터 결혼 이후, 황혼에 이르기까지 삶의 각 여정에서 사랑은 시인님께 어떤 형태이자 의미로 남아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 어떤 것보다 정의 내리기 어렵고 그 본질을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 사랑입니다. 2007년 병원에서 장기 입원환자, 중중환자로 있으면서 나름대로 소원이 있었습니다. 풀꽃, 질병, 고향, 시, 사랑, 이렇게 다섯 개 주제로 책을 한 권씩 써보리라 하는 결심이 그것이었습니다. 병원을 벗어난 뒤 그 주제들을 가지고 책을 모두 썼습니다. 그런데 가장 어려운 책이 사랑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사랑에 대해서는 아직도 자신이 없고 정답을 내지 못하겠어요. 그래서 사랑의 시를 계속해서 쓰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나의 경험으로 볼 때, 젊은 시절의 사랑은 상당히 성급하고 이기적이며 자기 본위적이고 자기 방어적이며 폐쇄적인 사랑입니다. 받기를 원하는 사랑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에고가 헐거워지면서 이기적이기만 한 사랑에서 타인을 생각하는 사랑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나이든 다음의 사랑을 나는 '하얀 사랑'이라고 명명하기도 합니다. 많이는 탈색되고 내려놓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다른 사람을 사랑해도 마음이 편합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묻는 젊은 벗이여 / 인생은 그냥 인생 / 인생은 그냥 너 자신 / 열심히 살아보자 / 삶 그것이 그대로 인생이 아니겠는가
- 나태주, 「인생을 묻는 젊은 벗에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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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인생과 마찬가지로 ‘좋은 사랑’도 그냥 해봐야 알 수 있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인생이란 것이 무정의 용어이듯이 사랑도 무정의 용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지식이나 말이나 형식으로 아는 앎이 있고, 실지로 실행할 줄 아는 내용적이고 실질적인 앎이 있습니다. 인생도 그렇지만 사랑은 특히 후자의 앎에 해당합니다. 몸으로 직접 살아보고 겪어보아야 아는 그런 앎이지요. 하지만 여기서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인생이든 사랑이든 그 바탕에 착한 마음, 부드러운 마음이 깔려야만 비로소 좋은 인생이 되고 좋은 사랑이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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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말라는데 가고 싶은 길’이 글쓰기였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교단에서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글을 써오셨던 원동력이 무엇이었나요?
좋아하는 마음입니다. 나는 결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글을 잘 쓰고 싶은 사람일 뿐입니다. 그것도 끊임없이 그러고 싶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공자님도 '논어'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인가에 대해서 아는 사람보다는 좋아하는 사람이 더 상위의 사람이고 좋아하는 사람보다 즐기는 사람이 더 상위의 사람이다.'
16세부터 시를 읽고 쓰고 생각하는 일이 그냥 좋았습니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이었습니다. 그 길이 이어지고 이어져서 60년을 넘겼습니다. 정식으로 시인이 된 것이 26세 때이니까 50년을 넘겼고요. 생각하면 참으로 이러한 곡절은 눈물겹도록 감사하고 고마운 일입니다. 어떤 분야든 한 분야에 깊이 있게 천착하는 사람은 그 내부에 자가발전기가 있어야 합니다. 다행히 나에게는 글을 읽고 쓰고 생각하는 데에 있어 자가발전기가 있었습니다. 그 발전기가 오늘날까지 나를 이끌고 왔습니다.
그냥 줍는 것이다 // 길거리나 사람들 사이에 / 버려진 채 빛나는 / 마음의 보석들.
- 나태주, 「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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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쓸 때 주로 어디서 영감을 받으시나요.
천지만물한테서 영감을 받습니다. 좀 더 상세히 밝히면 자연, 인간, 세상에게서 고루 영감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를 많이 쓰기도 했고 여러 주제로 쓰기도 했습니다. 주로 사랑하는 대상, 관심이 집중되는 대상에게서 영감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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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외에 시인님께 행복을 안겨주는 취미나 활동이 있으신가요?
별로 없습니다. 참 무취미한 사람이고 단순한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즐기는 것들을 나는 너무나도 많이 하지 못합니다. 스포츠, 운전, 바둑, 당구, 화투, 끽연, 그런 걸 도통 할 줄 모릅니다. 젊은 시절엔 술을 좀 마셨는데 그것도 15년도 넘게 금주를 하고 있는 상태이고요. 그래도 나는 하루 한 순간도 심심하게 지내는 날이 없습니다. 다만 남과 달리 즐기는 것이 있다면 자전거 타기, 산책하기, 혼자서 앉아 있기, 좋아하는 음악 듣기, 그림책 보기, 연필로 그림 그리기, 꽃밭 가꾸기, 등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시 쓰기와 연결되어 도움을 주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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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님의 작품을 읽으면 인생은 살아볼 만하고 좋은 것이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다시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좋았던 시절이 있다면 언제이신가요?
실은 인생은 언제나 문제가 있게 마련이고 지난한 것입니다. 구구절절 애달픈 것이고 힘겨운 것입니다. 이 세상은 결코 천국이 아닙니다. 그리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천사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을 천국이라고 생각하면 천국이 되는 것이고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천사로 생각하면 천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하루하루는 하늘로부터 받은 지극히도 귀하고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런 생각으로 살기 때문에 시도 밝은 쪽 아름답고 예쁜 쪽을 지향합니다.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야 물론 어려서 초등학교 다닐 때입니다. 외할머니와 함께 둘이서 우두막집에서 살던 시절이었지요. 아주 많이 춥고 가난하고 어렵던 시절이었지만 외할머니가 계셨기 때문에 행복했습니다. 지금도 꿈을 꾸면 시절의 나로 돌아가곤 합니다.
인생은 귀한 것이고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라는 걸 / 너희들도 이미 알고 있을 터, / 하루하루를 이 세상 첫날처럼 맞이하고 / 이 세상 마지막 날처럼 정리하면서 살 일이다 / 부디 저희들도 아름다운 지구에서의 날들 잘 지내다 돌아가기를 바란다 / 이담에 다시 만날 지는 나도 잘 모르겠구나.
-나태주, 「유언시- 아들에게 딸에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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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명을 ‘많이 보고 싶겠지만 조금만 참자’로 적어주셨습니다. 시인님께선 평소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죽음에 대해서는 누구나 무서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2007년 한 차례 죽음을 경험한 뒤로는 죽음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죽음이 사람을 찾아오는가, 사람이 죽음을 찾아가는가를 물을 때 사람들은 대개 죽음이 사람을 찾아온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죽음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죽음도 인생 과업 가운데 하나이고 변화라면 변화이고 성장이라면 또 성장입니다.
죽음이 결코 두렵거나 무섭지 않은 건 아닙니다. 하지만 피할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것이 메멘토 모리입니다. 너도 죽을 것이다. 죽음을 기억하라. 바로 그 명제이지요. 이러한 죽음 앞에서 나는 생각해 봅니다. 나의 일생 가운데 가장 힘들었던 일이 무엇일까? 그것은 누군가 사람이 보고 싶은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나온 짧은 문장이 나의 시 '묘비명'입니다.
많이 보고 싶겠지만 조금만 참자 - 나태주, '묘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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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시인님처럼 인생과 세상, 자연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시야를 가질 수 있을까요?
우선은 자기의 성과나 인생, 하루하루의 삶에 대해서 만족하고 소망을 갖는 일이 중요합니다. 오늘은 이만큼이었지만 내일은 좀 더 좋아질 거라는 희망을 갖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가슴에서 치솟는 실망과 분노와 절망을 달래야 합니다.
나아가 자신을 용서하고 자신을 위로하고 축복하고 자신을 칭찬하고 자신에게 상을 주고 휴식을 주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문제는 나 자신입니다. 나의 일이 잘 안 되니까 불행감을 느끼는 겁니다. 특히 자신을 용서하는 마음은 중요합니다.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어야 남도 용서하게 된다는 사실을 또한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시에 이런 시가 있습니다.
저녁에 잠든다는 건/ 내일의 소망을/ 가슴에 안는다는 일이고// 오늘의 잘못들을/ 스스로 용서하고/ 잊는다는 것이다.
- 나태주, 『저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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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통해 가족들에게 어떤 말씀을 전해주고 싶으신가요?
가족은 실상 오랜 세월 살 부비며 살았고 앞으로도 살아갈 사람들이기에 아웅다웅 싸우고 작은 일로 버팅기고 갈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 힘든 인생의 고비에서는 가족밖에 없습니다. 나는 나 혼자서 오롯이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부모나 형제, 아내나 자녀는 인생의 마지막 보루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그분들에 대한 시가 나오는 것입니다.
늘 고맙고 감사한 사람들이 가족이지요. 고맙습니다, 인생의 끝날까지 함께 가겠습니다. 이런 당연하고 구태의연하지만 절실한 말을 남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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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시인’부터 ‘교장시인’ 등 다양한 수식어를 갖고 계신데요. 어떤 시인으로 독자들에게 기억되고 싶으신지, 또 향후 작품 계획은 어떻게 되시는지 궁금합니다.
교단 현직에 있을 때는 '교장시인'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교장의 옷을 벗었으니까 '풀꽃시인'이 더 좋습니다. 그리고 교장시인은 여럿일 수 있지만 풀꽃시인은 '풀꽃' 시를 쓰는 쓴 오직 한 사람 나태주에게 주는 이름이기에 더욱 풀꽃시인이란 이름에 정을 느낍니다.
영화 '기생충'에서 보면 아버지로 나온 송강호 씨가 물난리를 겪고 이재민이 되어 학교 강당 같은 곳에서 잠을 자면서 아들에게 말하지요. '아들아, 인생이란 계획이 없는 것이란다.' 그렇습니다, 나에게도 별다른 계획은 없습니다. 더욱이 늙은 사람이기에 계획을 가질 수가 없지요. 가는 데까지 가보고 써지는 데까지 써보겠다는 게 내 나름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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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가지 말라는데 가고 싶은 길’을 걷고 있는 수많은 독자 분들께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자유롭게 적어주세요.
가지 말라는 길이지만 그 길은 당신이 가고 싶은 길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이라는 것! 당신은 분명히 지금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그쪽으로 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은 비록 소득이 적고 곤고하며 지치고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을지 몰라도 제발 그러지는 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길을 끝까지 가다 보면 분명히 좋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바로 당신이 바라고 꿈꾸는 당신 자신을 만나는 일이 그것입니다. 끝까지 가십시요. 지치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요.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용기를 가지십시요. 그러다 보면 끝내 당신이 꿈꾸고 바랐던 당신의 모습, 또 다른 당신의 웃는 얼굴이 당신을 맞아줄 것입니다. 부디 그 당신과 만나 악수하시기 바랍니다.

나태주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 「풀꽃」을 집필한 대표적인 국민 시인이다. 그동안 펴낸 책으로는 시집, 산문집, 동화집, 시화집 등 100여 권이 있으며 공주문화원장을 역임했고 현재 한국시인협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대숲 아래서」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였으며, 등단 이후 50여년 간 끊임없는 창작 활동으로 수천 편에 이르는 시 작품을 발표해왔다. 또한 공주에서 공주풀꽃문학관을 설립·운영하며 풀꽃문학상, 해외풀꽃시인상 등을 제정·시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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