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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완결

호서대 김동주박사의 생명시리즈

by 조작가의 책세상 2021. 3. 31.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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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완결”
창1:24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25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1:27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 그리스도 생명은 우리에게 여섯째 날의 새 창조를 경험케 한다. 주님은 제6일에 동물 생명의 세 종류를 만드셨다. 가축과 짐승과 기는 것이다. 가축은 노동과 가죽과 고기를 내서 다른 이를 먹이는 생명이다. 비둘기 생명은 참 좋은 것이지만 레위기에 의하면 화목제의 제물로 수용하시지 않는다. 제물이라고 하더라도 제사에 따라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제물이 있다. 그만큼 그리스도의 구속의 제사가 세밀하다는 것이다. 레위기에 다섯 제사가 나온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이다. 그중 번제와 속죄제에서는 하나님께서 비둘기를 받으신다. 이는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비둘기처럼 작은 믿음이지만 순전한 그리스도와 연합하였기에 수용하신다는 것이다. 속죄제에서 비둘기를 받는다는 말씀은 참으로 작은 제물이지만 어찌하든 하나님께서 비둘기 분량의 그리스도의 공로로 우리에게 구속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둘기는 화목제로 사용될 수 없다. 그 말은 비둘기 한 마리로 모두가 풍성한 잔치를 누릴 수 없다는 말이다. 고로 당신의 믿음은 한 면에서 비둘기이지만 다른 면으로는 생명의 성장을 통해 제6일의 풍성한 가축 생명으로 성장해야 한다. 즉 모두를 먹이고 섬기는 생명이다. 아무리 당신 혼자서 비둘기처럼 순결한 믿음을 가지고 산다고 하더라도 당신 눈이 비둘기의 눈이라고 하더라도 홀로 신앙 생활하고 자기 자신의 순결만을 추구한다면 이는 성숙이 아니다. 섬기기 위해서도 공동체가 필요하고 당신이 사랑받고 또 처리받기 위해서도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들이 필요하다. 그 몸 안에서 비둘기로만 있는 것이 아니고 가축으로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축이 되어야 한다.
한 가지 알 것은 구약은 가축 제사로 구원 받고 신약은 그리스도 제사로 구원 받는다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사실이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모든 사람은 가축이 아니라 그리스도 제사로 구원 받는다. 구약의 가축 제사는 단지 그리스도 제사를 예표하는 표지판으로만 사용되는 것이다. 고로 구약의 아벨도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 받은 것이다.
 
제6일의 가축 생명은 ‘공급 생명’이다. 다시 기억하자. 비둘기는 번제나 속죄제에 들어가지만 화목제에는 절대로 없다. 생명의 지체들이 풍성이 누릴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가축으로 성장시키는 소망이 필요하다. 신령한 젖을 주고 고기 자체까지도 주는 것이다. 사역과 목양은 무엇인가? 가축으로서 우리 자신을 주는 것이다. 우리에게서 나가도 주님에 의해 채워지기 때문에 아무 염려가 없다. 사실 진실로 모든 것을 이미 우리에게 전부 제공하신 주님이야말로 우주적 양이요 소이셨다.
여섯째 날에 등장한 세 종류를 살펴보자.
첫째, 짐승이다. 이는 야수의 생명으로서 사자 같은 것이다. 그리스도는 유다의 사자이셨다. (창49: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성경은 늘 세 가지를 이기라고 말씀한다. 사탄과 육신과 세상이다. 죄는 이 셋에 관계된 것이다. 사탄을 따르고 육신에 매몰되고 세상을 추구하는 것이 죄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의 강력한 야수 생명으로 그 셋을 이기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며 그 생명의 성장을 추구하면 우리는 이 강력한 생명이 자연적으로 자라서 흘러나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많은 신자들이 가족과 이웃에게 사자처럼 굴고 세상에는 양처럼 끌려간다. 그러나 우리는 정반대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와 이웃에게는 양이 되어야 하며 세상에는 사자 같아야 한다. 땅에 기는 존재는 6일 째에 나온다. 이는 생명 안에서는 섬기는 것이요 생명 밖 옛 창조에서는 땅을 추구하는 뱀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생명 안에 성숙해지는 과정에 가장 주의해야할 대적인 교만이 처리되야 하는 것이다. 진리가 높아지고 말씀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더 섬기는 낮은 자가 되어야 하며 뱀 같이 기는 자가 돼서는 아니 된다.

여섯째 날 생명의 절정은 무엇인가? 그것은 남자와 여자이며 신랑과 신부이다. 하나님은 한 커플을 만드셨다. 이것이 성경 최고의 생명이고 진리이다. 우리는 빛이 되기 위해 믿는가? 우리는 풍성한 인생의 나무가 되기 위해 믿는가? 생명의 물고기가 되고 비둘기가 되고 가축이 되기 위해 믿는가? 이것이 최종 목적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과정이다. 최종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기 위해 믿는다. 영으로 충만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정결한 신부가 되어 그분과 영원한 연합과 사랑을 하기 위해 믿는다. 이것이 성경의 가장 높은 진리이고 목적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부부의 이야기이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와 우리이다.

롬5:14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그렇다. 아담의 이야기는 그리스도 이야기의 모형이다. 아담을 만드시고 하와를 지으시고 또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 신부를 지으신다. 아담의 갈비 대를 통해 하와가 나오듯 그리스도의 강력한 뼈에서 생명의 신부가 조성된다.
엡5:31-32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말하는 이 비밀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것이라.” 바울이 부부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실은 구약의 그 말씀이 육신의 혼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와 우리의 혼인에 관해 말씀하고 있다고 말한다. 바울은 창세기 말씀을 통해 부부에 교훈을 주면서 동시에 이 말씀들을 우리가 옛 창조 안에서만 풀이할까봐 비밀을 열어주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와 신부인 우리 이야기이다.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영광의 위치를 버리시고 종의 형체를 가져 이 세상에 오신 분이다. 나는 옛 아담과 사탄을 떠나 그리스도에게 왔다. 그분도 하늘을 떠나시고 나도 옛 세상을 떠나 서로 사랑하고 하나가 되었다. 생명의 신앙 절정은 바로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가 되는 것이다. 창1장 첫째 날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빛을 주신 이유는 그저 빛 안에서만 머무르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 나아가기 위한 빛을 주신 것이다. 둘째 날 물을 가르신 것도 하늘만 내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랑과 신부의 영역을 만드신 것이고 셋째 날 나무와 열매를 내신 것도 신랑과 신부로 자라게 하기 위한 것이다.
요한계시록 21:2절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는 말씀이 바로 완성이다. 우리는 모두 살아있는 새 예루살렘도 되며 동시에 살아있는 도성이며 바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다. 성경의 마지막 권면도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이다. 가축의 생명에서 나아가 그분의 신부가 되기를 소망하며 우리 안에 오신 생명이 우리를 그리스도 신부로 조성시킬 것을 신뢰하며 우리는 창1장을 감사함 가운데 읽는다. 주 예수님은 신랑이요 생명이시다. 할렐루야!
 
오 주 예수님 당신을 신랑으로 만나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를 이 땅에 내시고 신부로 구원하셨으니 신부 생명이 넘치게 하소서. 영원한 연합과 합병과 일체를 위해 오셨으니 우리를 더 사로잡아 주시고 그리스도께 더 끌리게 하시고 당신 때문에 행복하게 하소서 우리 남편이신 내 주 하나님이시여 얼마나 위대하고 감사한지요. 오늘의 우리 삶이 신부로서 정결하게 준비되는 날들 되게 하소서 오 주 예수여 주 예수여 주 예수여
 



“생명의 형상”
창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골1:15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 성경 한 구절 한 구절은 하나님의 숨으로 된 것이라 상상할 수가 없는 신비한 것이다. 창세기 1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모양(Likeness)을 따라 그리고 하나님 형상(Image)에 따라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로 지어진 것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모양은 하나님과 유사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은 누구이고 하나님의 모양은 대체 무엇인가? 바울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임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인간으로 나셔서 인간 모습을 한 것으로 알지만 사실 인간이 만들어질 때 그리스도 모습을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신비한 분이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와서 우리에게 이루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조성하는 것이다. 롬8:29절,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부르사 아들의 형상을 닮게 하려고 미리 정하셨으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은 자로 창조되었으나 범죄 하여 모든 것을 상실하였다. 오직 형상의 파편만을 가진 존재가 되어 깨진 거울이 비추는 형상처럼 죄인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를 보일 수 없게 되었다. 율법을 소유하고 지키려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이 스스로 보일 수 없다.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도 모르는데 하나님의 형상을 보일 수 있고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는가! 이제 그리스도 예수가 하나님의 형상이시라 우리 안에 오셨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씨처럼 자리 잡게 되었고 이것이 자라나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가 그리스도를 닮게 하기 위해서 부르셨다는 것이다. 우리 안의 생명이 자라나면 결국 누가 우리에게서 나오고 어떤 형상이 있고 어떤 모습이 나오겠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 안에 온 거룩한 영은 무엇을 이루는가? 당신은 성령이 무슨 일을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가? 실망한 당신에게 위로와 쓰러진 당신에게 능력을 주시고 애절한 당신에게 은사를 주시는 분으로 생각하는가? 다 초보적 이해이다. 성령은 하나님 자신이시며 그리스도의 영이요 본질로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며 이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구약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첫 사람이 지어졌으나 신약은 우리가 그리스도라는 하나님 형상을 회복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실제도 얻게 되었다. 형상이란 외면을 나타낸다. 그리스도는 분명하고 확실하게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주셨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보면 하나님을 보는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보여주는 형상으로 온전히 생활하셨다. 우리 안에 오신 그리스도 생명은 그리스도의 실제이시다. 형상은 내면의 실제가 외적으로 나타날 때 존재가 되는 것이다. 고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제이신 그리스도까지 소유하게 된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하나님 자체를 나타내는 것이고 하나님 모양은 그것이 밖으로 찍혀지는 것이다. 새 창조 안에서 우리는 영으로 태어났다. 그러면 결국 마지막 목표는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인데 이 신부는 자기의 독립적 형상을 이루는 것인가? 아니다. 그는 누구의 형상을 이루는가? 그리스도의 형상이므로 그리스도가 보여지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하나님이 보여진다. 그리스도 형상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실제인 생명까지 소유한 존재인 것이다. 이것이 신약의 복음이다.

주 예수님은 우리를 구속하셨다. 아들의 형상을 닮아가게 하시는 일은 우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시는 그리스도의 일이다. 그의 영이 끝까지 이루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영이 이루시는 것이다. 인간의 가장 어리석은 일은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자기가 스스로 흉내 내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 모양도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여 일하실 때 진짜 모습이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타락함으로 다 깨져버렸다. 그 파편만으로도 인간은 이렇게 아름다운 문화나 업적을 남긴다. 그런데 하물며 그리스도의 형상이 온전히 이루어지면 얼마나 엄청난 새 예루살렘이 지어지겠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시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우리 속에 이루는 것인데 우리는 성별은 여성이다. 신부가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영원히 연합하는데 이 연합이 가지는 비밀은 그리스도가 가진 모든 것을 내가 그대로 가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운명은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충만이 들어있어서 결국엔 우리 운명은 바울의 말씀으로 하자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는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요한의 말씀으로 하면 요일3:2에 “장래에는 그와 같이 될 줄을 앎이라”이다. 베드로의 말씀으로는 벧후1:4에 “우리가 주의 신성한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느니라.”이다. 참예는 바로 코이노니아(koinonia) 즉 교통이란 단어이다. 성령의 교통의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를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과 모든 풍성으로 이르게 하는 것이고 실어 나르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것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시는 것이다. 온전이시요 영이시요 진실이시요 평강이시요 기쁨이시요 모든 선함이시요 능력이시요 모든 지혜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가지신 영광과 보좌와 권세와 통치를 다 합쳐 우리에게 실제로 공급하고 제공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다. 하나님의 속성, 요소, 본성, 본질 자체가 우리에게 그대로 전해지는 것이 연합이다. 우리가 단순히 예수 믿다가 천국 가는 차원이 예수 믿는 것의 전부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충만을 생명 안에서 가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짐승 생명으로 살다 우리 인생이 끝난다면 얼마나 비극인가! 오늘날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기독교에 예수님을 끼워 맞추는 것을 중지하고 그리스도 생명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고 이루시는 신앙으로 나아가자.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태어났을 때 우리 외부는 하나님의 형상이 되고 내부에는 하나님의 생명을 갖게 되었다. 새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으로 오셨고 영원한 생명으로 계시고 부활한 생명으로 거하신다. 이 생명이신 분은 우리 속에서 인격을 이루어서 한 아기로서 자라고 계신다. 한 아기이신 그리스도는 우리가 개인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절대 원치 아니하시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연결된 전체적이고 우주적인 교회를 원하신다. 타고난 육신 생명이 아닌 영원 생명으로 창조하시기를 원하신다. 자기의 뜻과 마음대로 행하는 바벨탑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바벨은 결국 무너지는 것이고 생명으로 가득한 자들만이 주님이 충만한 새 예루살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주 예수님은 우리 형상이요 실제요 기적이요 생명이시다. 할렐루야!
 
오 하늘의 빛이신 주 예수님 나의 하나님 당신의 사랑에 감사합니다. 거룩한 영을 더 허락하시고 우리 안에 넘치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우리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그리스도 당신을 닮게 하소서 오 주 예수여 주 예수여 주 예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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