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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트래블(76)

북트래블

by 조작가의 책세상 2021. 5. 6.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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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코로나북트래블(76)(2021.05.06.목)

<내 사랑 백석>(김자야 산문)

백석,열렬하고도 슬픈 생애에 신화가 된 사랑 이야기
시인 백석과 기생 자야의 짧고도 영원한 사랑


1.백석의 연인이자 본명 김영한,기명 김진향, 기생 출신인 자야가 백석과의 생활을 그린 산문집을 내었다. 자야(연인이었던 시인 백석이 지어준 아호이다.1916^1999,향년84세)는 어렸을 때 어버지를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란다. 금광사업에 빠진 친척의 사기로 집안이 파산하자 1932년 16세때 조선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된다.자야는 3년후에는 해관 신윤국 선생의 후원으로 일본에 가서 공부하던 중 해관선생이 투옥되자 면회차 귀국하여 함흥에 일시 머물렀다.1936년 함흥에서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와 있던 청년 시인 백석과 사랑에 빠졌다.
이 때 김진향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지어주고 이듬해 말,김자야에게 만주로 가서 자유롭게 살자는 제의를 했으나 자야는 갈등끝에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서울로 혼자 떠난다.
일순간에 시작된 사랑,일평생에 걸친 그리움이 되었다.
백석은 자야에게 말한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죽기 전엔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2.1938년(백석 나이27세,자야22세) 백석은 교원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돌아와 <조선일보>기자가 되고 애인 김자야와 다시 재회하고,청진동(현 종로구청앞이 청진동이다) 김자야의 집에서 동거한다.
두 사람에게는 이 기간이 허니문이었다. 기생의 신분이었던 자야와 백석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했었다.
이때 백석은 부모가 강제로 혼인을 세 번이나 시켜 자야는 백석으로부터 떠나고자 친구랑 상해로 간다.
죽고 싶었으나 죽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상해에서 1달을 보내고 다시 서울로 와 백석을 만난다. 하지만 자야는 마음을 다부지게 먹지만 사랑이 그리 빨리 식던가! 가슴앓이만 할 뿐이다.
1939년 백석은 <여성>지의 편집을 다시 그만두고 만주의 신경으로 옮겨 가버린다. 이게 백석과 자야의 생이별이 되고 간간이 자야는 백석의 소식을 듣는다.
인편에 겨울옷을 지어서 보냈다.
해방이 되자 백석은 1945년 34세때 귀국하여 한때 신의주에서 거주하다가 고향 정주로 돌아와 과수원일을 돌본다. 38선이 가로막아 둘은 더이상 만날 수가 없었다.
자야는 서울에 산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생략되어 있다.
자야는1953년 중앙대 영어영문학과를 만학으로 졸업했다. 스승 하규일 명인과 연인 백석을 추모하는 사업에 평생 매진했고 <무소유>를 읽은 뒤 법정 스님에게 시가 천억 대의 서울 성북동 길상사 부지를 시주했고 '길상화'라는 법명을 얻었다.

"천 억이 그 사람 시 한줄만 못하다"고 자야는 말했다.

3.자야는 평생 가슴에 백석의 사랑을 새기며 백석의 생일날이면 곡기를 끊고 굶어서 백석을 기렸다.
백석생일,자야생일(12월5일),음력 8월14일 어머니의 생신등 해마다 세 번의 참회지일로 정하고 있다. 1999년 향년 84세로 별세했다. 백석은 월북시인이라는 오명을 벗고 재북시인으로 자야보다 3년 빠른 1996년 85세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사실이 뒤늦게 확인되었다.백석은 모던보이였다. 러시아어도 잘해 러시아문학을 번역했다. 백석이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백석,동주,지용,소월이 내가 사랑하는 시인이 되어버렸다.

4.자야는 백석의 삶에만 초점을 맞췄다.80년을 살면서 두 사람이 사랑했던 20대를 고스란히 복원했다. 모던보이였던 시인 백석과 권번에서 가곡과 무용을 제대로 배운 자야 둘다 요새말로 일본 유학파였다. 1930년대말 풍경을 그려볼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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