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성장”
히브리서 9: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 피가 주어이다. 피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 우리가 피로 씻는 것이 아니다. 사실 진짜 살아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다. 육체를 거절하는 것이 중요한데 육체의 정결도 단번에 그리스도가 이루시고 선물하신 것이다. 십자가와 부활을 거친 삶은 우리 자신이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내 안의 생명이 주시고 조성해가는 일이다. 우리는 알거나 모르거나 십자가와 부활을 거친 과정이 이미 관유를 통해 나의 속과 삶에 발라져 가고 있다.
영에 속한 생활은 생명이 있으면 이미 그 영을 사는 사람이고 그 열매는 그리스도와 사랑이다. 생명나무가 자라면 이 열매를 맺는다. 특히 우리는 생명이 있고 사랑이 있기에 이미 작은 열매지만 그리스도 안에 이미 거하고 있다. 또 정말로 복음을 만난 사람으로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생명이 없을 수가 없고 생명이 있는 사람은 사랑이 없을 수가 없다.
그리스도 생명이 왔기에 육체(자기 종교=빌3)를 부정하는 삶을 이미 살고 있고 또 우리 육체에도 생명을 주셔서 하나님을 위한 유익한 육체가 된다(고후4:11). 그약에 제사장과 왕이 아닌 일반 육체에 관유를 붓지 않았지만 신약은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심으로 일반 육체에 관유를 부으시는 새 역사를 내었다. 구약을 이루기 때문에 관유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육체에 부어지면서 자격까지 부여하는 관유의 능력으로 우리 육체는 제사장이 되었다. 그가 날마다 늘 부으시고 바르신다. 우리를 그리스도로 빛나게 하신다.
히6: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 피가 우리를 씻듯이 결실도 그리스도가 내신다. 우리 스스로의 노력으로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시도는 율법의 생활이기에 스스로 온전한 열매를 맺으려는 어린 시도를 중지하고 그리스도 안식 안에 늘 머물러 안식의 열매를 맺고 늘 찬송하여 찬송의 열매를 맺자. 말씀을 하늘로 생각하고 모든 구절을 부활 안에 읽으며 땅인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비가 말씀 안에서 내리고 있기에 그리스도를 신뢰하자. 그분이 확장되시며 열매를 내게 하신다.
창세기 40:8 “요셉이 말하되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9 술 맡은 관원장이 그의 꿈을 요셉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꿈에 보니 내 앞에 포도나무가 있는데...
16 떡 굽는 관원장이 그 해석이 좋은 것을 보고 요셉에게 이르되 나도 꿈에 보니 흰 떡 세 광주리가 내 머리에 있고”
: 많은 사람들이 육체의 정결을 위하여 또 열매를 위하여 선한 고민을 한다. 나도 그러하다. 그런데 성경이 주시는 답인 창40장을 무엇보다 깊게 보아야 한다. 요셉이 감옥에서 술관원장과 떡 관원장의 꿈을 해몽해 주었다. 감옥은 그리스도 장사지냄을 가리키는데 참 요셉인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장사지냄을 통해 우리를 조성하시는 말씀이다. 술 관원장의 꿈은 바로에게 포도주를 바치는 꿈으로 새로 살아나는 것이고 떡 관원장의 꿈은 광주리의 떡을 새들에게 주는 꿈으로 육신이 매달리는 꿈이다. 여기서 술관원장이신 그리스도를 보는 것과 떡관원장이신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두 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일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와 생명의 포도주를 받게 되고 또 우리 육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종결되고 심판 받은 것이다. 참 요셉으로서만 그리스도가 일하실 뿐만 아니라 참 술관원장으로서도 일하시고 참 떡관원장으로서도 일하신다. 여기 오히려 요셉이 “청하노니 내게 말하소서” 하지 않는가! 이를 일생 누리자. 그가 겸손히 오히려 청하신다. 우리에게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라고 하신다. 또 그분이 술관원장으로서 바로왕처럼 교만한 나에게 생명의 포도주를 겸손히 낮아지시며 바치셨다. 또한 그리스도가 떡관원장으로서 우리 죄를 지시고 그의 육체가 우리를 덮어서 고난과 심판을 받으셨다. 고난을 받으며 그의 육체 안에 있는 생명이 짜여져 우주로 흘러 나왔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육체를 입은 사람이 되고 또 사람의 아들이 되셨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사역을 우리에게 적용시키신다. 술 관원장으로 이 땅에 오셔서 많은 이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피로 육체까지 정결하게 하시며 새로 살게 하신다. 또한 떡 관원장으로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육체에 죄를 정하시고 육체를 종결하고 그의 못박히심 안에 우리를 포함시키시고 우리 육체까지 그의 장사지냄에 함께 빠지고 거치게 하신다. 생명이 있는 우리 육체는 비록 후패해가지만 십자가와 장사지냄을 거쳤으며 그 속에 생명이 있으며 후패하는 가운데도 부활의 씨가 심겨져 자라는 쓰임 받는 도구가 된 육체이다. 육체는 천성, 재능, 신분, 지식, 종교 등을 포함하는 것이다(빌3:4).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부분인데, 요셉이 두 관원장 중 누구의 꿈을 먼저 듣고 해석해 주었지는 아는가? 이는 정말 중요하니 일생 기억하자. 요셉은 술관원장의 꿈을 먼저 해몽해 주었다. 그리고 이어서 떡관원장이다. 이는 떡인 육체의 온전한 처리를 우리가 바라고 소망하지만 먼저 생명의 술에 집중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술관원장을 늘 누리면 그분이 동시에 떡관원장으로서 우리 육체의 모든 항목들 위에 그가 자신의 과정을 작용시켜 처리하시고 정결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온전하게 하신다. 즉 생명을 먼저 주시고 생명이 육체를 처리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생명의 포도주를 늘 마시고 생명의 떡을 먹으면 저절로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더 활용되고 육체는 처리되며 부활의 씨는 어떤 형태이든 자라고 있는 것이다. 고로 육체의 처리와 거룩은 우리가 노력으로 완성하는 일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일이시다. 우리 안의 생명이 온전히 하는 것이다. 그러니 근심할 순간에 그리스도를 다 누리도록 하자. 자신이 어리석다고 한탄할 시간이 있다면 이는 영적으로 당연한 것이니 한탄을 얼른하고 이어서 곧 구주 예수의 포도주를 마시고 누리고 취하고 찬송하는 상태로 나아가자. 육체를 내가 먼저 처리하고 생명을 누려서 온전해지는 것이 아니고 생명을 누려서 생명이 육체를 처리케 하는 것이다. 당신이 자아를 죽여야 그리스도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생명을 부으셔서 당신 자아를 처리하시고 일하신다. 육체란 나 자신이다. 고로 육체의 처리는 아담이 줄고 그리스도가 나타나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생명의 키가 자라기를 우리는 늘 바라는 데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가 자라겠는가! 그냥 우리가 잘먹고 잘자고 잘뛰면 컸듯이 우리 내적 생명도 그리스도를 먹고 마시고 안식을 누리고 연단을 통해 자라게 된다. 고난 없이 온전한 성장이란 없기에 누군가 고난이 없고 성장만 바란다면 이것도 합당한 자세가 아니다. 지금 고난을 적게 주신 것은 감당할 믿음만큼 주신 것일 뿐이지 결코 교만할 일도 아니다. 인생 전체를 통해 고난을 적절히 훈련으로 받게 하시며 우리를 그리스도의 포도주로 더욱 익어가게 하신다. 내 육체를 거절하는 노력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고 그리스도 생명이 하는 일이며 그리스도 장사지냄을 통해 이미 일어난 것이니 이를 믿음 안에 누리자. 장사지냄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낸 홍수이기에, 다 휩쓸어 갔기에 오히려 행복한 것이며 부활을 통해 육체를 생명 안에서 새롭게 사용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난다. 주 예수님은 우리 술관원장이시요 떡관원장이시며 참 요셉이시요 구속이시요 거룩이시요 온전이시요 생명이시다. 할렐루야!
오 주 예수님 감사합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오늘도 행복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피가 일으키신 역사를 오늘도 찬송합니다 더 느끼게 하시고 누리게 하소서 우리를 술관원장으로 사용하여 주소서 그리스도를 더 마시게 하시고 우리가 늘 취하게 하시고 모두를 그리스도로 취하게 하소서 우리 자신의 육체와 부족으로 근심하지만 생명의 처리와 역사를 신뢰하며 찬송합니다 그리스도 생명의 충만으로 이끌어 주소서 오 주 예수여 주 예수여 주 예수여